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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특집] 조광조의 개혁 정신이 깃든 묘소와 용인 심곡서원

 

[ 타임즈 - 김시창 기자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는 역사적 가치가 깊은 문정공 조광조의 묘와 신도비, 그리고 심곡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한양조공 정암 조광조 선생 묘역'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역 가장 위쪽에 조광조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광조 부부의 합장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광조는 1515년(중종 5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는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하여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특히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시행하여 유교적 이상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향후 사림파 입지를 확고히 하는 발판이 됐다.

 

 

조광조는 다양한 유학정치 실현을 위한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경전을 포함시킴으로써 유학사상의 근본을 중시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 다른 용도로 사용됐던 성균관을 복귀시켜 유학의 상징성을 되살렸다. 소격서를 혁파하여 왕실에 남아 있는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몽주 등의 신원을 회복하여 사림의 정통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소학을 중시하고 향약을 보급하여 성리학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다.

 

 

그러나 조광조는 훈구파의 계략과 중종의 변덕으로 인해 기묘사화를 겪는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기성세력인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1519년 음력 12월 20일 유배되어 전라도 능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 봄에 용인 심곡리에 안장됐다. 이어 선조 때 신원이 이뤄져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조광조의 묘소는 1557년 조선 명종 12년에 심곡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조광조의 봉분은 그의 아내 한산 이씨와 합장묘로 돼 있으며 묘비와 혼유석, 상석, 문인석, 망주석 등이 배치돼 있다. 묘비 앞면에는 조광조와 정경부인 한산 이씨의 주요 관직이 새겨져 있다. 묘역 앞 50m 거리에는 1585년(선조 18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조광조 묘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심곡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50년(효종 1년)에 건립된 서원이다. 이 서원은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유산으로, 2015년 1월 28일에는 사적으로 지정됐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현 제향, 지방 교육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원 내부에는 사당, 내삼문, 장서각, 치사제, 강당, 동재, 서재, 외삼문, 산양재가 남아 있다. 또한 조광조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500여년의 느티나무가 연지와 함께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조광조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유학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개혁정신은 조선 후기 사림파의 세력 강화에 핵심 역할을 했다. 비록 그의 개혁이 훈구파의 저항으로 인해 중단됐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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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창 기자

타임즈 대표 김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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