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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역사적 가치와 의미 되새기는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 유적

 

[ 타임즈 - 김시창 기자 ] 명성황후 생가 유적은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황후였던 명성황후(1851~1895)가 출생 후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특히 그녀의 어린 시절과 조선 후기의 정치적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는 조선 후기 주요 인물로 고종의 비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다. 그녀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 혼란 속에서 조선의 주권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러 업적을 남긴 바 있다.

 

 

무엇보다 명성황후는 외교 활동에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조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갑신정변 이후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서양식 교육과 의료를 도입하는 등 근대적 개혁에 힘썼다. 이처럼 그녀는 고종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조선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명성황후는 군사적 방어 노력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청나라와의 연계를 통해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또한 군사 훈련과 무기 도입을 추진하는 등 국방력 강화를 위해 힘썼다. 내정의 안정화 역시 그녀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고 백성들의 복지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으며 서양의학의 도입과 교육제도의 개혁을 통해 조선의 사회적 발전을 도모했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원래 1687년(숙종 13년)에 왕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됐다.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27평 규모의 안채 뿐이었으나 지난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됐다. 또한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한 방이 있던 자리에 그녀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여주시는 지난 1995년부터 경기도와 함께 명성황후 생가를 성역화하기 위해 생가복원 이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인현왕후와 명성황후가 머물렀던 감고당을 복원하기도 했다. 감고당은 조선 후기의 건물로 명성황후 민비의 생가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던 묘막이다.

 

 

현재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는 다양한 역사적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명성황후 탄생 마을을 기념하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 명성황후 시해 112주기를 맞아 지난 2007년 생가유적지로 이전된 명성황후순국숭모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하는 하마비, 그리고 명성황후를 추모하기 위한 비 등이 대표적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근대화와 주권 수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본의 강압적인 침략, 내부의 혼란 속에서 이를 온전히 실현하기 어려웠다. 결국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명성황후 생가 유적은 이러한 명성황후의 개혁 정신을 되새기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기리기 위한 중요한 장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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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창 기자

타임즈 대표 김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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