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임즈 - 김시창 기자 ] 인천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외세의 침입에 맞선 결사항전의 거점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고려 대몽항쟁, 조선 시대 병자호란, 근대사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까지 강화도는 시대마다 중요한 전쟁터였으며 최전선의 방어 요새 역할을 했다.
특히 강화해협을 따라 이어진 수많은 방어 시설 중 초지진과 덕진진은 조선 후기 강화도의 전략적 방어체계를 대표하는 요새다. 실제로 외세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최격전지였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둘러보며 조선의 국방체계와 역사의 흐름을 되짚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역사 여행이 될 것이다.

초지진은 1656년(효종 7년) 당시 강화유수 홍중보에 의해 김포에서 강화도로 이전된 방어 요새다. 강화해협을 지나는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가운데 조선 후기 강화도의 12진보 체제(5진 7보) 중 하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초지진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요호 사건(1875년)에서 외세의 침략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요충지였다. 1866년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공격할 당시 초지진은 첫 번째 방어선이었다. 5년 후인 1871년 신미양요에서는 미 해병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인해 다시 초지진이 파괴되었는데 이는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초지진은 조선의 대외적 국방이 점차 무너져 가는 과정에서 외세의 강압과 조선의 저항이 가장 먼저 부딪쳤던 장소였다.
현재 초지진은 복원 작업을 통해 일부 성곽과 포대가 재현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강화해협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서 당시 조선군이 지켜야 했던 최전선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강화초지대교와 서해 바다는 150여 년 전 이곳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병사들의 흔적을 되새기게 만든다.

초지진에서 차로 약 5분 거리에는 덕진진이 자리하고 있다. 덕진진 역시 강화해협 방어를 위한 요새로 1666년(현종 7년) 강화유수 서필원의 요청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후 숙종 대에는 만호 체제로 승격되면서 더 강력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덕진진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공격을 피해 양헌수 부대가 삼랑성(정족산성)으로 이동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신미양요 때는 미군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전장이기도 했다. 덕진진은 조선 후기 강화도 방어 체제에서 초지진과 함께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는데 그 위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현재 덕진진에서는 과거 조선군이 사용했던 대포와 포좌(대포를 설치하는 자리) 등이 전시되어 조선 후기 군사 요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면 강화해협을 통해 밀려오던 외세의 위협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병사들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처럼 인천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전투들이 펼쳐진 곳이다. 대몽항쟁 당시 고려가 38년간 버텼던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병자호란과 근대 열강의 침략에 맞섰던 국방의 요충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둘러보는 것은 조선의 마지막 저항을 기억하는 의미 있는 역사 체험이다.

강화도는 그 자체로 한국의 마지노선이었다. 그곳에는 패배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했던 조선의 정신이 남아 있다. 지금도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고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따라 걷다 보면 150여 년 전 조선군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 땅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